字: 士立. 號: 虎溪. 官職: 察訪 효자 申元祿의 손자, 晩悟公의 兄으로서 정구(鄭逑, 號: 寒岡). 장현광(張顯光. 號: 旅軒)의 문인으로 1627년(인조5)丁卯胡亂때 의병을 일으켰다.斥和主張하였고 祥雲察訪에 特除授되었으며,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. ?신달도(申達道1576∼1631) 字: 亨甫. 號: 晩悟, 官職: 持平. 孝子 申元祿의 손자(申?의子), 趙穆(號: 月川,東皐)과 張顯光의 문인으로 1623년(인조1)정시문과에 壯元한 후 司憲府,司諫院에서 요직(掌令)을 역임했으며 1627년 丁卯胡亂때 왕을 강화(江華)로 扈從(호종)하였고, 正言으로 있으면서 척화(斥和)를주장하여 최명길(崔鳴吉)등의 주화론(主和論)을 극력 배격했다. 뒤에지평(持平)이 되었고 도승지(都承旨)에 추증 되었다.
『호계집(虎溪集)』은 신적도(申適道 ; 1574∼1663)의 시문집이다. 신적도의 자는 사립(士立), 호는 호계(虎溪), 본관은 아주(鵝洲)이다. 이 책은 후손 신상하(申相夏)·신돈식(申敦植) 등이 간행하였다. 서(書)는 정구·장현광·정경세(鄭經世)·이경석(李景奭) 등 당대 명유에게 준 것이 많다. 신적도는 신흘의 아들이며, 정구(鄭逑)와 장현광(張顯光)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. 1605년(선조 38) 향시에 합격였으나,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.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학산(鶴山) 미곡(微谷)에 채미헌(採薇軒)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.